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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강해 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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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그리스도편지 작성일 :작성일 :14-11-13 20:36 조회 : 469회 댓글 :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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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5:6절을 보겠습니다. (신 375쪽)

“너희가 옳은 자를 정죄하였도다 또 죽였도다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도살의 날입니다.

도살장을 눈앞에 두고도 마음을 살찌우고 있습니다. 정말 아무리 강조를 해도 지나치지 않지만 이 시대는 도무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부자가 된다는 것이 어떠하다는 것을 야고보는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부자가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부자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다 어디에서 나온 사상인가 하면 바알입니다. 얼마나 부자가 되고 싶은가를 이 시대 노래에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그렇게 살 순 없을까 하면서 그렇게 살고 싶은 마음을 노래로 하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도살을 당한다는 것을 모르고 부자가 되고 싶어서 노래를,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부자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부자가 되겠다고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살겠다고 서원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하고 있는 그런 행위들이 어떻게 된다는 것을 모르고 그저 사람의 이성으로 바르게 판단이 되는 그것을 보면서 부자가 되고 싶어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성경을 몰랐다고 생각합니까? 그래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자가 되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자가 되지 말라고 하는데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부자가 되겠다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거절하는 율법의 행위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부자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그것으로 해서 마음에 부자가 되어 살을 찌우고 있었고 또 겉으로는 회를 칠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부자에 대해서 비유로 말씀을 하셨어도 이스라엘은 부자가 누구인가를 모르고 더욱 더 부자가 되기 위해서 애를 썼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교회 안에 있는 부자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역시 부자가 되는 것을 좋아하고 있습니다. 아니 부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으로 미혹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사람의 이성으로는 부자가 너무도 보기에 좋기 때문에 그것을 마다할 사람이 없습니다.

 

율법으로 부자가 됩니다.

그리고 은사로 부자가 됩니다. 성화로서 부자가 되고 있습니다. 지식으로 부자가 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그렇게 부자가 되고 있지만 그들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그것을 오히려 겸손하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 모양을 내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를 보면 성경과 얼마나 벗어나 있는 가를 쉽게 알 수 있지만 이해를 못하고 있습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없으면 다 부자가 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 야고보서를 바로 해석을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제까지 신학자들의 강해나 주석을 보아도 어느 누구 하나 행함이 있는 믿음에 대해서 바르게 해석을 하지 않았고 교회는 더욱 더 부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로 많아졌습니다. 그리고 부자가 되는 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단이라고 공격을 합니다.

부자가 되지 말라고 하면 이단이라고 까지 공격을 합니다. 사실 부자가 되라고 하는 것이 다른 복음인데도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사람에게는 없어서 아무리 위대한 신학자라 해도 행함이 있는 믿음을 모르고 있고 그것으로 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영향을 받아 도살할 날이 가까이 왔는데도 마음을 살찌게 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이성입니다

분명히 부자가 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을 음행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진노의 포도주를 마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으로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성경에서 어떻게 말씀하는 가를 깨달을 수 있는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성령이 오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깨달을 수 없는 영의 비밀입니다. 육을 가지고 있는 인생들의 이성으로는 지혜로는 그것을 깨달아서 알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욱 더 부자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도살을 눈앞에 두고도 자기가 부자가 되는 줄로 모르고 그렇게 부자가 되어서 도살장으로 끌려가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드리지만 이 성경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이 보고 있습니다. 도살의 날을 눈앞에 두고 있는 사람이 누군가 하면 바로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들이 무슨 악을 행했는가 하면 옳은 자를 정죄하고 죽였습니다.

 

누가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습니까?

바로 교회 안에 있는 부자들이 죽였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부자가 되어 도살을 눈앞에 두고 있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죽이면서 뭐라 생각을 했는가 하면 이것이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태복음27:19절을 보겠습니다. (신 49쪽)

“총독이 재판 자리에 앉았을 때에 그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 하더라”

 

저희가 옳은 자를 정죄 하였도다

또 죽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빌라도의 재판장에 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정죄하고 죽음에 이르게 했습니다. 비록 이방인이고 빌라도의 아내지만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를 옳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폭동이 일어날 것으로 염려해서 빌라도는 사형을 처하고 결국에는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정죄합니다.

유대인은 율법주의에 빠져 있기 때문에 법에 따라 정죄를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법에 따라서도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다고 인정을 받으셨지만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을 따라 정죄를 했습니다. 주님께서 율법을 안 지켜서가 아니라 율법에 사로잡혀서 정죄를 했습니다.

 

이것이 율법주의입니다.

그들은 무엇이든지 다 정죄를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야고보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에서 정죄의 직분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는 이스라엘은 정죄의 직분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정죄의 직분을 가지고 있는 이스라엘은 모든 것을 다 율법에 따라 정죄를 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의의 직분입니다.

교회 안에는 정죄의 직분을 가진 자도 있고 의의 직분을 가지고 있는 성도도 있습니다. 율법을 단 한 가지라도 지키고 있는 모든 사람은 정죄에 직분에 빠져 있습니다. 정죄의 직분은 정죄를 해서 죽이는 직분이고 의의 직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거저 줌으로 해서 살리는 직분입니다.

 

자기가 어느 직분에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스라엘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 하늘에 올라 가셨습니다. 이제는 다시 죽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정죄의 직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역시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실제 죽일 수는 없을지라도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거절하고 있습니다.

 

옳은 자를 죽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도 똑같이 죽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그 자체가 죽이고 있는 것임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오직 예수를 안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만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 역시 예수를 안 믿고 있습니다. 아니 말로는 예수를 믿는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행위를 보면 다 부자가 되어서 구속의 은혜를 거절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왜 죽였습니까?

바로 자기들의 율법의 의 때문에 죽였습니다. 사실 그들은 성경을 어려서부터 보고 조상 대대로 하나님을 믿어왔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를 못 했습니다. 물론 그것이 다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럴지라도 사람의 속성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습니다.

 

요한복음3:19절을 보겠습니다. (신 146쪽)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왜 죽였습니까?

이스라엘은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니 빛이 무엇인지 어두움이 무엇인지를 몰랐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습니다. 정말 이 시대 역시 참 빛이 무엇인지 어두움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세상 이성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그래서 더욱 더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를 정죄하고 죽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스라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시대 교인들 역시도 참 빛과 어두움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흠 없는 율법의 의가 어두움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이성과 눈으로 보고 그것을 빛으로 보았습니다.

 

참 빛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빛입니다. 그래서 더욱 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구속의 일은 참 빛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행하는 행위는 다 어두움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위해서 일을 했다 하지라도 어두움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어두움을 더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 어두움은 자기들이 열심을 내서하고 있는 복음을 위해서 하고 있는 일이기 때문에 더욱 더 사랑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는 보이지 않고 자기들이 하고 있는 의는 보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어두움을 더 사랑하고 있습니다.

 

악 합니다.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고 있는 행위가 악하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자기들이 행하고 있는 악한 것을 선하고 의롭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사망으로 끌고 가는 것임에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죽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행위가 악해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해서 그러한 일을 했습니다. 이 시대도 교회 안에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는 모든 사람은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그 어두움이 마음을 살지게 하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부자가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행위라고 생각하면서 어두움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 시대 역시 교회 안에서 행위에 빠져 있는 모든 사람은 그것을 어두움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을 어두움이라고 하면 분을 내면서 참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람의 이성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빛을 모르고 어두움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모르다 보니까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모든 행위가 다 어두움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사실 복음은 이것을 깨닫는 데서부터 출발인데도 이 기초를 모르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그것이 인생들이 가진 지혜의 한계입니다. 성령이 오시지 않고는 이 빛과 어두움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한 행위만 어두운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모든 행위 역시 어두움이라는 것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어두움을 더 사랑합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게 하는 결정적인 원인입니다. 하지만 역시 이 시대도 어두움을 더 사랑하고 있습니다. 참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미혹이 되고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한 행위는 율법이라고 하고 자기들이 하는 행위는 믿음이라는 말로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고 거기에 다 넘어가고 있다고 보면 맞습니다.

 

어두움으로 정죄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어두움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정죄하였습니다. 이 시대 역시 자기들이 하고 있는 어두운 행위로 사람들을 정죄를 하고 있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절하고 있습니다. 어두움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정죄하고 또 그를 죽이게 되어 있습니다.

 

이사야53:7절을 보겠습니다. (구 1033쪽)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의 예언입니다.

주님은 이 예언 그대로 이스라엘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면서도 대항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빛을 몰라서 어두움을 더 사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정죄하였습니다. 그리고 빌라도의 법정에 세워서 죽였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서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실 때 정말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당신이 이스라엘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면서 이 세상 죄를 지고 가셔야 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도수장으로 끌려가면서도 그 입을 열지 않고 잠잠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 그대로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에 의해서 십자가형을 받으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그것은 이 세상 죄를 지고 가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저항을 하기 않았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이 세상 오신 목적이 바로 이 세상 죄를 지고 가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지 않으면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죽일 때 대항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런 것입니다.

이 세상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주님은 이스라엘이 옳은 자를 정죄를 하고 죽일 때도 대항하지를 않았습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우리와 똑같은 육체의 모습을 입고 오셨습니다. 정말 그 당시 십자가형은 가장 잔인한 형벌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가는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인간으로서는 가장 고통스러운 형벌 중에 하나였습니다. 우리나라와 같은 날씨가 아니라 중동 지역은 아주 더운 날씨입니다 그런 곳에서 십자형을 받기 전에 채찍으로 거의 반은 죽이게 때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더운 날씨에 목이 타 들어가는 고통을 당하면서 서서히 죽어야 하는 것이 바로 이 십자가 형입니다.

 

그것을 모르시겠습니까?

주님은 너무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이마에 땀이 피가 될 정도로 흘리면서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옮길 만하면 옮겨 달라고 기도를 하셨습니다. 사람의 형상을 입고 오셔서 당하셔야 하는 그 십자가형이 너무 고통스럽다는 것을 아시고 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으셨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셨습니까?

주님은 그 잔을 기꺼이 받으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에 예언이 되어 있는 그대로 도수장으로 끌려가면서도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어두움을 사랑해서 자기 땅에 오신 메시아를 정죄를 하고 죽였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을 대항하지 않고 십자가에게 죽으셨습니다.

 

예언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 말씀을 보면서도 도무지 깨닫지를 못 했습니다. 영의 일이라는 것이 바로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면서도 그들은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라고 하면서 너무도 당당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원인이 어디서 왔는가 하면 철저한 율법주의에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대항을 하지 않고 그대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 사랑을 깨달아야 하는데 말로는 아니 지식으로는 알고 있지만 그것이 믿어지지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 그랬던 것과 같이 이 시대 역시도 율법주의에 깊이 빠져 들어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악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구원입니다.

우리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난하다고 믿고 있는 아니 자기가 얼마나 가난한 자인가를 알고 있는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죽임을 당하면서도 이스라엘에게 대항하지 않았습니다.

 

부자들은 모릅니다.

자기들이 얼마나 악하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죽이면서까지도 그것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교회 안에서 율법으로 단 한 가지라도 부자가 되어 있는 사람들은 이 영의 비밀을 도무지 깨달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의 보내심을 받은 성도만이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있습니다.

 

야고보서를 보시기 바랍니다.

아니 야고보서 뿐 아니라 이 시대 성경을 얼마나 거꾸로 해석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같은 경우에는 조금 더 심하게 하고 있지만 거의 모든 성경을 거꾸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다 성경을 사람의 이성으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문자적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이사야의 예언을 보고도 도무지 깨닫지를 못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성경을 얼마나 틀리게 해석을 하고 있는가를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이 문제는 생명이 걸려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교회에만 나오면 이상하게도 자기 생명에 대해서 너무 쉽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생명에는 그렇게 신중하고 애착을 갖는 그들이 영의 생명에 대해서는 너무 당연하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26:53절을 보겠습니다. (신 47쪽)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모든 능력을 가지고 계시는 분입니다. 당시 로마가 아무리 강대하다 할지라도 주님의 능력만으로도 로마의 모든 권세를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원하시기만 하면 열두 영이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있어 십자가형을 피할 수 있습니다.

 

천사입니다.

아마 이 천사들이 나타난다면 이스라엘 뿐 아니라 로마의 군인들까지도 그 자리에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천사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입니다. 그런 능력이 있는 천사을 보내주실 수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대항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정죄를 받으셔서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우리를 위해 속죄 제물이 되셔야 하는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기 몸을 단번에 드리기 위해서 대항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약에 주님이 대항을 하면 이스라엘은 절대로 죽일 수 없습니다. 로마의 군대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하나님을 죽일 수는 없습니다.

 

육체의 싸움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영의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영의 싸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죽임을 당하셔야 우리 인생들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실 수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옳은 자를 정죄하고 죽이려 해도 그것에 대항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말씀입니다.

 

육체의 싸움이었으면 분명히 열두 영이 더 되는 천사를 불렀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 십자가의 비밀을 아무도 모르게 감추어 두셨습니다. 사단까지도 이 비밀을 도무지 깨닫지 못하게 하심으로 사단이 이스라엘을 감동을 해서 자기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임으로 말미암아 뱀의 머리가 상하게 되었습니다.

 

사단은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죽이려고 유대인들을 감동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죽이는 그 일이 자기 머리를 상하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대항하지 않고 죽임을 당하시니까 주님이 죽음으로 해서 모든 것이 끝이 나고 자기가 이제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주님은 대항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부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까지 어느 누구도 부활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부활할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지만 사단도 그것을 몰랐고 또 이스라엘 역시도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습니다.

 

부활입니다.

이것은 정말 신비한 일입니다, 육체의 부활이 아니라 영의 신비한 부활입니다, 죽었던 주님이 부활을 하신 것과 같이 아담으로 말미암아 죽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이 탄생이 되고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이 세상의 몸이 아니라 하늘의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새로운 영을 탄생하게 하시고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전혀 다른 썩지 않는 부활의 신령한 몸을 입혀서 천국에서 영원히 함께 살기를 원하셔서 그 영의 신비한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대항하지 않고 이스라엘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야고보서5:7절을 보겠습니다. (신 375쪽)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참고 견디십시오. 보십시오, 농부는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땅에 내리기까지 오래 참으며, 땅의 귀한 소출을 기다립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실 때까지 길이 참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이 세상은 부자들의 세상입니다. 부자가 예수 그리스도까지 죽였습니다. 정말 교회는 늘 부자에 의해서 가난한 자들이 법정으로 끌려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부자들이 사치하고 연락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성경을 보면 늘 그렇게 해 왔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를 보아도 그렇고 이방의 교회도 역시 부자들이 모든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솔직히 초대 교회를 지나오면서 이제까지 교회사를 보아도 역시 부자들이 교회의 주권을 행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천주교도 부자였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문서로 기록이 되어 있는 책들을 볼 때 과연 성도가 있었는가 하는 것을 냉정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천주교도 부자였고 또 프로테스탄트 교회 역시도 부자가 되었습니다. 성도라고 할 수 있는 형제들은 거의 보이지가 않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대도 역시 부자들의 세상입니다. 과연 성도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 찾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늘 부자들은 교회를 종교로 만들어서 그 안에서 사치와 연락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를 지나오면서 이 야고보서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면 맞습니다.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리고 있습니다.

 

성도가 없습니다.

천주교와 기독교를 거쳐 오면서 구원을 받을 성도가 거의 없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해석을 한 이 야고보서 강해 한 가지만 보아도 너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종교 개혁을 한 루터도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이 야고보서는 성경으로 취급을 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루터만 그렇습니까?

그래도 루터는 양심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신학자들은 야고보서를 다 거꾸로 해석을 했습니다. 그것이 쌓이고 쌓이다 보니까 이제는 어느 누구도 그것을 바로 잡을 수 없습니다, 너무도 유명한 신학자들이 야고보서를 행위를 강조하는 말씀으로 해석을 하다 보니까 그것이 이제는 굳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르면 모른다고 하는 것이 좋습니다.

모르면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런데 모르면서도 아는 것처럼 이야기를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가 되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사실 모른다고 하면 다른 아는 사람을 통해서 알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르는 사람이 안다고 하면 더구나 그가 유명한 신학자이면 사람들은 거의 맹목적으로 그가 말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어 있습니다.

 

인쇄술이 발달을 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책들이 나오기 시작을 했습니다. 자칭 신학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남긴 책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책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그 중에서 진리를 바로 전하고 있는 책이 얼마나 되는가는 진리로 인도함을 받고 있는 성도만이 알고 있습니다.

 

인쇄가 발달을 해서 책이 대중화 된 것이 불과 200여년 되었습니다.

물론 아주 유명한 신학자들의 글은 그 이전이라도 책으로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책들은 불과 200여 년 전부터 쓰여 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책들이 쓰여 지기 시작을 했을 때는 이미 교회는 거의 다 율법주의와 성화주의 그리고 은사주의에 깊이 빠져 들어가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들이 책을 썼습니다.

그리고 그 책들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고 그것이 마치 성경의 권위와 비슷하게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 유명한 신학자들에 의해서 잘못 해석이 된 설교집이나 그리고 강해 주석들을 보면서 그것을 신학에서 배우다 보니까 그것이 마치 진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신앙서적을 봅니다.

지금 이 시대를 보시기 바랍니다. 요한계시록의 환상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의 심판이 그대로 보이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책들이 나오고 있습니까? 성경보다도 그런 책들을 보면서 그가 더구나 유명한 신학자이면 성경보다도 더 그 책에 있는 글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이 시대 교인들의 모습입니다.

 

참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인터넷이라는 매체가 발달을 해서 누구나 자기가 생각하는 글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것을 또 다른 사람들이 함께 공유를 하면서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모르면서 안다고 하며 글로 남기는 것이 얼마나 큰 죄가 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왜 부자가 많습니까?

그것은 성경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안다면 절대로 부자가 되려고 하지 않을 수 있는데 성경을 모르다 보니까 서로 부자가 되기 위해서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안다고 해야 더 많은 사람들을 자기 교회 안으로 끌어 들일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 아는 척을 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1:4절을 보겠습니다. (신 334쪽)

"그리고 너희의 참는 모든 핍박과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을 인하여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함이라"

 

왜 길이 참습니까?

성도는 이 세상에서 부자들에 의해서 환난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시대도 진리를 알고 있는 성도는 핍박과 환난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솔직히 그리스도편지가 그렇게 많이 알려지기가 않아서 그렇지 아마도 어느 정도 세력을 갖추고 알려지기 시작을 하면 지금 정통이라고 하는 교회에서 아마도 분명히 이단이라고 공격을 받을 것입니다.

 

그들은 부자입니다.

그 부자들은 자기들이 사치하고 연락하는 그것을 쓰레기 취급을 하면 참지를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부자가 되려고 무던히도 노력을 했는데 그것이 아무 의미가 없는 쓰레기와 같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악한 것이라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핍박을 합니다.

십일조를 악이라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일이라고 하는 날을 악한 행위라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들이 지키고 있는 성탄절과 추수감사절 그리고 송구영신 예배가 다 짐승에게서 미혹이 된 악한 행위라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다수의 힘을 빌어서 그리스도편지를 이단이라고 공격할 것이 너무도 분명합니다.

 

사람의 이성으로도 그렇습니다.

그리스도편지에서 전하고 있는 말씀은 그들이 도무지 이해를 하지 못 합니다. 자기들이 하고 있는 하나님을 위해서 하고 있는 선한 일들이 악하다고 하면 누가 더 나쁘다고 생각을 하겠습니까?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선지자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누구와 싸웠습니까?

다 율법주의자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부자들과 싸우다가 핍박을 받았습니다. 늘 교회는 부자들에 의해서 사치와 연락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소자들은 깨닫지 못하고 그저 사람의 이성으로 생각해서 그것이 옳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그들과 같이 부자가 되려고 따라갔습니다. 물론 가끔 가다가 세상에서 핍박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표입니다.

거의 모두 다 교회 안에서 핍박을 당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도는 이 세상을 사는 동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도 만약에 그리스도편지가 알려지면 아마도 심하게 핍박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핍박을 받으면서 산 것이 성도입니다. 교회는 늘 부자들이 사치하고 연락을 했기 때문에 사실 성도들이 그들과 함께 하지를 못 했습니다.

 

성도입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이 세상의 주인이 아닙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고아고 과부고 나그네입니다, 더구나 율법을 폐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율법을 아주 잘 지키고 있는 그들에게 핍박을 받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결과입니다. 부자들이 있는 교회 안에서 성도가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그 복음을 이제 듣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교회 안에서 자기가 들어왔던 그 지식이 그대로 있어서 마치 내게 복음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는 것으로 오해를 하다가 더 큰 실망을 하고 핍박을 당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영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육을 돕지 않습니다. 설령 내가 구원을 받고 성경에서 모든 진리를 다 알고 있다고 해도 육적으로 돕지 않는다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도 주의 강림하실 때 까지 길이 참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육체적으로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 같으면 참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육체적으로 직접 도와주시면 되지 왜 참습니까?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 까지 길이 참으라는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육체적으로 도와주시지 않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기 때문에 길이 참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게시물은 그리스도편지님에 의해 2015-03-11 16:35:25 로마서강해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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