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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강해 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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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그리스도편지 작성일 :작성일 :14-10-09 22:28 조회 : 583회 댓글 :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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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6:17절을 보겠습니다. (신 342쪽)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부자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정말 교회 안에서 부자가 되는 순간 그는 망하는 길로 가게 되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 시대는 자기가 부자가 되어 있으면서도 그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연약해서 짓는 도덕적인 모든 죄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지고 가셨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의 죄를 지고 가셨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제는 의의 싸움입니다.

그런데 이 의의 싸움을 하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자기의 의가 있으면 자기도 모르고 바리새인과 같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바리새인과 같이 모든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라 단 한 가지의 율법이 부자로 만들고 있습니다.

 

누가 높아집니까?

부자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부자는 자기를 아무리 낮추고 싶어도 그것이 안 됩니다. 디모데전서의 말씀을 모르고 있습니다. 정함이 없는 재물이라고 하니까 이 세상 재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비유를 모르면 그는 어쩔 수 없이 부자가 되어 자기가 얼마나 가난한 가를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정함이 없는 재물은 사람의 의입니다.

 

교회 안에서 행하는 의입니다.

그 재물에 마음을 두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이 정함이 없는 재물이 소망을 두지 말라고 하는가 하면 이것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정함이 없는 재물이 율법이고 성도의 삶이라고 하는 성화의 행위고 또 교인들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는 은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높아집니다.

율법을 지키면 높아집니다. 자기에게서 성화의 한 모양이라도 나타나면 높아집니다. 그리고 은사가 나타나면 높아집니다. 주 앞에서 낮추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런 것들로 인하여 절대로 낮아지지가 않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낮아지는 모양을 내고 있지만 그 마음에서는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부해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곧 사망의 길입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사도바울이 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 부한 자들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내 의가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있습니다. 내 모든 행위는 정함이 없는 재물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는 정함이 있는 재물입니다. 사실 이것을 사람의 이성으로 깨닫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정말 성령이 오시지 않고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대 교회를 보면 이것에 다 넘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재물이 한 가지라도 나에게 있다면 그는 절대로 주 앞에서 낮아질 수 없습니다. 시편의 고백과 같이 자기가 가난하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은 비유입니다. 그리고 은유와 그림자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모르고 성경을 보는 사람은 결국에는 사망에 이르게 되어 있습니다.

 

안타깝습니다.

아무리 그리스도편지를 통해서 이 의에 대해서 말씀을 드려도 그것을 지식으로는 알고 있지만 행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들을 보고 지식으로 알고 있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야고보서에서 왜 행함이 있는 믿음을 말씀하는 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정함이 없는 재물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면 뭐합니까?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화가 되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또 자기에게 있는 은사가 너무도 좋습니다. 이런 모든 것이 다 정함이 없는 재물이라는 것을 알면 그것을 버리는 성도만이 주 앞에서 낮아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사람의 시체와 썩은 뼈라는 것을 알면 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이 오시지 않아서 그런 것이 사람의 이성으로 너무 좋기 때문에 주 앞에서 낮아지지가 않고 도리어 점점 더 높아지고만 있습니다.

 

가난해야 합니다.

가난해 지려면 율법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내가 살인한 자요, 간음한 자요, 도적질한 자요, 우상을 숭배한 자요, 십계명의 어느 한 가지도 지키지 못한 자라는 것을 알고 또 율법의 어느 한 가지도 지키지 못한 자라는 것을 아는 성도만이 주 앞에서 낮아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과 같이 되면 자기가 아무리 주 앞에서 낮은 모양을 낼지라도 그는 이미 높아져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로마서11:20절을 보겠습니다. (신 255쪽)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믿음입니다.

이스라엘이 왜 꺾이었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믿지를 않았고 자기들의 행위로 높은 마음을 품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아 그 가지가 꺾이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도 마찬가지로 믿음에 서지 않으면 반드시 꺾이게 되어 있습니다.

 

비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없는 모든 사람은 다 교회 안에서 높은 마음을 품게 되어 있습니다. 그가 아무리 신실하게 보일지라도 믿음이 없으면 다 높은 마음을 품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믿음과 행위는 함께 가질 수 없습니다. 믿음이 있고 행위도 좋고 하는 것은 이 세상의 이성적 생각입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주의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행위로 높은 마음을 품었습니다.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으로 높은 마음을 품었고 또 할례를 받은 그 표징을 보면서 높은 마음을 품었습니다. 자기들의 몸에 있는 그 할례로 인하여 그들이 얼마나 높은 마음을 품었는가를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할례는 받지 않을지라도 십일조가 그들의 마음을 높게 하고 있고 주일이라는 날이 마음을 높게 하고 있고 그들이 드리고 있는 예배를 통해서 그리고 찬양을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높은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그들이 믿지 않고 있다는 것을 증거 해 주고 있지만 깨닫지를 못하고 도리어 더 높아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합니까?

십일조를 내는 것이 낮아진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를 성경에서 보고서도 자기들이 십일조를 내는 그것이 오히려 낮아진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주님께서는 높아지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주님의 말씀까지도 무시를 하고 있습니다.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어떻게 말씀을 하셨는가를 아시기 바랍니다. 십일조를 내는 것이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높아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거꾸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십일조를 내게 해 달라고 바알에게 눈물을 흘려 가면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높은 마음을 품고 있으면서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있습니다.

 

주 앞에서 낮추시기 바랍니다.

그러려면 먼저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기가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모든 행위에 소망을 두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아니 이 정함이 없는 재물이 있는 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낮추고 싶습니까?

행위로 낮아지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가증스러운 행위에 속지 않는 분이라는 것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버려야 합니다. 그런 성도만이 주 앞에서 낮추고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도 않은 사람이 주 앞에서 어떻게 자기를 낮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서 있는 성도만이 주 앞에서 자기를 낮추고 있는 사람입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의 은혜를 믿어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믿지도 않는 그가 어떻게 주 앞에서 낮출 수 있겠습니까?

 

믿음을 모르면 안 됩니다.

아니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으면 안 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안 믿었습니까? 그들은 분명히 종교적으로 볼 때는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었습니다. 그것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고 성경에서 누누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시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까?

그가 아무리 믿고 있다고 주장을 해도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고 있다면 그는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주 앞에서 높아져 교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정함이 없는 재물로 높아져 있는 사람은 반드시 그 가지가 꺾이게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주 앞에서 낮추시기 바랍니다.

행위로 낮추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를 믿어야 그가 낮아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말로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오셔서 이루신 구속의 일들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그가 정함이 없는 재물을 한 가지라도 가지고 있다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낮추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알아야 주 앞에서 자기를 낮출 수 있습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고 또 내가 하는 모든 행위가 다 악한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주 앞에서 낮출 수 있습니다. 정말 자기를 알아야 주 앞에서 자기를 낮추고 주님께 은혜를 구할 수 있습니다.

 

잠언4:8절을 보겠습니다. (구 914쪽)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믿음은 그를 높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행위는 나를 높이는 것입니다. 주 앞에서 자기를 낮추려면 믿어야 합니다. 그렇게 믿는 성도들에게 높여 주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너무 행위에 빠져 있습니다. 초대 교회를 지나면서 교회는 급격하게 율법주의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2000년이 지났으니까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높아져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자기를 낮추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어느 정도로 낮추어야 하는가 하면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합니다. 죽은 사람은 자기를 높이지 않습니다. 문제는 자기가 아직까지 살아 있기 때문에 높이고 있습니다.

 

주 앞에서 낮추시기 바랍니다.

야고보서는 행위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행위를 함으로 해서 자기를 높이지 말고 오직 믿음으로 가기를 낮추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야고보서를 보면서 사람들은 행위로 자기를 높이고 있습니다. 성령이 오시지 않아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무엇이 자기를 높이고 무엇이 자기를 낮추는 것인 줄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도입니다.

이 세상에서 죽기까지 자기를 낮추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그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내 육체를 낮춤으로 해서 주님께서 주님의 날에 나를 높여 주시겠다는 것이 성경말씀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성경을 보고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자기를 높이는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입니다.

이스라엘만 바리새인이 있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시대 교회는 거의 바리새인화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자기 몸에 행한 할례를 보고 또 율법의 행위를 보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를 하고 살았지만 그들을 주님께서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역시 이 시대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고 하지만 십일조를 내고 있고 주일을 지키면서 마귀의 자식이 되었습니다.

 

성도는 나를 높이지 않습니다.

어떻게 은혜를 입은 자가 자기를 높이겠습니까? 그 자체가 은혜를 모르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은혜를 입은 자는 자기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자기를 낮추고 은혜를 준 자를 높이게 되어 있습니다. 은혜라는 단어의 뜻만 알아도 아니 은혜를 자기가 받았다면 절대로 자기를 높이는 그런 행위들을 하지 않습니다.

 

그를 높이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나를 낮출 때 가능한 일입니다. 나를 높이면서 그를 높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나를 높이면 그가 낮아지고 나를 낮추면 그가 높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행위는 나를 높이는 것이고 믿음은 그를 높이는 것임을 바로 알아야 하는데 이 시대는 믿음이 무엇이라는 것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5:6절을 보겠습니다. (신 382쪽)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겠다고 말씀합니다.

그 때가 언제입니까?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나를 높이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성도는 이 세상에서 죽을 때 까지 낮아진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도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어느 사도가 이 세상에서 높아졌습니까? 그들은 이 세상에서 정말 낮아졌습니다.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이 언제입니까? 교회 안에서 나를 높이시겠다는 말씀입니까? 교회 안에서 자기를 높이려고 하는 자는 니골라당입니다. 지금의 교회는 너무 타락을 해서 사람들의 감각이 없어졌습니다. 너무 오랜 시간 동안 교회가 타락의 길로 가다 보니까 사람들은 교회가 당연히 그런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높아지는 자기를 보면서 주님께서 때가 되어서 자기를 높여 주셨다고 말 합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다니고 있는 교회를 높여 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유명한 목사가 되고 또 그 교회가 거대하게 성장을 하는 것을 보면서 주님께서 때가 되니까 자기들을 높여 주셔서 이렇게 되었다고 자랑을 하고 있습니다.

 

절대 아닙니다.

때가 언제입니까? 그것은 주님이 오실 때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셔서 영접을 받아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국에서 왕 노릇하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지 이 세상에서 그리고 교회 안에서 높아지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성도는 낮아집니다.

정말 사람들이 보기에는 저 사람들이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일까 하는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행위를 보면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고 인정을 하지 않을 정도로 낮아집니다. 아카데미를 하고 있지만 가끔 다녀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사무실에 와서 보고 남의 사무실을 빌려서 예배하는 것을 보고 이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 사람이냐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당연히 예수를 믿으면 주님께서 높여 주신다는 생각이 그들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이 세상에서 복을 많이 받는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교회도 근사하게 지어야 하고 또 목사도 유명해야 하고 또 재물도 풍성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상들이 다 바알에서 온 것임을 모르고 이 세상에서 높아지려 하고 있습니다.

 

높아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아니 그것을 높아지는 것이라고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높아져 있으면서 겸손의 이야기를 하고 있고 또 그 모양을 내는 것으로 마치 자기들이 주 앞에서 낮아진 것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낮아진 자기들을 주님께서 높여 주시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말이 안 됩니다.

사실 앞뒤 말이 안 맞으면서도 그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이 이 시대 교인들의 모습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높아지지가 않습니다. 교회사를 통해서 나타나고 있는 거의 모든 교회는 사실 주님의 교회라기보다는 종교라는 것을 여러분이 분명히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교회가 아니라 기독교라는 종교입니다.

 

성도는 낮아져 있습니다.

사실 복음이라는 것이 세상에 많이 알려지지가 않습니다.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선지자들이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이스라엘이 어떻게 했는가를 알면 됩니다. 주님이 오셨을 때도 이스라엘은 영접을 하지 않았는데 하물며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받아들이겠습니까? 이 세상의 이성으로는 복음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나를 낮추는 것은 사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아무 것도 하지 말라고 이 말씀을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도 그것을 절제하고 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종교에 미혹이 되어서 교회만 나오면 무엇이라도 하고 싶어 하고 있고 교회는 그것을 적절하게 이용을 하면서 사망으로 끌고 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높아지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정말 할 수 있다면 최대한 낮아지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행동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행위가 최대한 낮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알면 자기를 높이고 싶어도 높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 시대는 예수를 너무 모르고 있고 겸손의 모양을 내면서 한 없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높아지려고 하지 마시고 주님께서 오시는 그 날을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상상하는 것 보다 더 크게 주님께서 여러분을 높여 주실 것입니다. 천사들도 여러분에게 다스림을 받을 정도로 높아지는 그 날을 바라보면서 이 세상에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반드시 높여 주십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있는 성도만이 바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에 내가 얼마나 높아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성도는 이 세상에서 자기가 한 없이 낮아지지만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때가 이 세상에서가 아니라 주님이 오실 때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야고보서4:11절을 보겠습니다. (신 375쪽)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무엇으로 피차에 비방을 합니까? 믿음은 마음에 있습니다. 그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서로 비방하고 말 것이 없습니다. 아니 믿음은 하나님께서 동일하게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믿음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비방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비방하다

남을 헐뜯고 비난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어디서 일어나고 있는 일인가 하면 바로 교회 안에서 있는 일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고 있는 일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피차에 비방을 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드리지만 성경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보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피차에 비방을 하고 있기 때문에 야고보가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비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무엇을 가지고 비방을 하는가 하면 바로 율법을 가지고 비방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잘 지키고 있는 사람은 율법을 잘 지키지 못하는 사람을 비방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어느 정도로 율법을 가지고 비방을 했는가 하면 사마리아 사람들이 이방에 포로가 되었다가 돌아오면서 또 그곳에 다른 민족들과 섞이면서 혼혈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비방했습니까?

사마리아 사람들을 개로 취급을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오셨을 당시에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만나면 서로 마주치지 않으려고 피해서 갔고 또 사마리아를 거쳐 어디로 가려면 사마리아가 가까운 곳인데도 멀리 돌아서 갈 정도였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율법에 비추어서 사마리아 사람들은 혼혈이 되었기 때문에 그들을 심지어는 개로 취급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났을 때도 그 여인이 유대인이 왜 자기에게 말을 거느냐고 하면서 놀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유대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말도 안 했는데 주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을 거니까 너무도 이상했던 것입니다.

 

율법 때문입니다.

이방에 의해서 나라가 망하고 어쩔 수 없이 혼혈이 되었는데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에 비추어서 사마리아 사람들을 비방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일조를 내는 사람들은 십일조를 안내면 비방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또 주일을 지키는 사람들은 주일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비방하고 있습니다.

 

보시기 바랍니다.

정통이라고 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그리고 안식일 교회가 있습니다. 안식일 교회는 자기들이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안식일을 지킨다고 하면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지금 정통이라고 하는 교회들을 비방을 하고 있습니다. 또 정통이라고 하는 교회는 안식일이 이제 변해서 주일이 되었는데 아직까지 율법을 지킨다고 하면서 서로 비방을 하고 있습니다.

 

안타깝습니다.

안식일은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저녁까지입니다. 그리고 주일은 일요일입니다. 어느 날에 예배를 한다 한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것이 비방을 할 일입니까? 토요일에 예배를 하면 어떻고 일요일에 예배를 하면 어떻습니까?

 

그것이 문제가 됩니까?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됩니다. 사실 안식일이라고 하는 것도 그렇고 주일이라고 하는 것도 역시 율법주의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면서 서로 비방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는 그대로 하지 않으면 서로 피차에 비방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토요일에 예배를 하면 안 됩니까? 일요일에 예배를 하면 안 됩니까? 꼭 그 날 해야 합니까?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제사 제도를 분명히 폐하셨는데 아직까지 그 제사 제도를 가지고 서로 비방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예배를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 비방을 합니까?

서로 율법주의에 빠져 있기 때문에 비방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방을 하고 있다는 그 자체가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안식일도 율법이고 주일도 율법입니다. 제가 어느 한 날에 예배를 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나 안식일 교회의 안식일도 율법이고 또 정통이라고 하는 교회들이 지키고 있는 주일도 율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어느 날 해야 한다고 하는 그 자체가 이미 율법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사도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성경에 유대인들에게 가서는 안식일에 복음을 전했고 또 이방인들에게 가서는 일요일에 복음을 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느 날이면 어떻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서 그가 듣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는다면 그것이 착한 일입니다. 물론 지금 이 시대 쉬는 날이 있습니다. 모두가 쉬는 날에 예배를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안식일이 잘못 되었다 주일이 잘못 되었다고 하는 그 자체는 자기들 스스로가 율법에 빠져 있다고 증거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시대 교회가 너무 율법주의가 되었습니다.

아마도 제가 예배를 한다고 하면서 어느 장소에서 예배를 할 때 지금 정통이라고 하는 교회에서 하는 새벽예배와 그리고 수요 예배 그리고 금요 철야 예배를 안 드린다면 아마도 저를 비방할 것입니다 아니 이미 기존의 교회에 다니던 사람들은 이상한 이단이 하나 또 생겼네 하면서 교회에 한번 왔다가도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비방을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어떻습니까? 제가 예배를 할 때 사도신경을 외우지 않으면 아마도 그것을 가지고도 비방을 할 것이 너무도 분명합니다. 예배를 하면서 사도신경을 외우지 않는다고 하면서 아마도 일반 교인들은 이단이라고 생각할 것이 분명합니다.

 

사도신경이 무엇입니까?

사도들이 만들어 놓은 것입니까? 그것이 아니라 천주교에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과 일치합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그 사도신경을 외워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배의 형식까지도 율법주의에 빠져 자기들이 하는 것을 하지 않으면 비방을 하는 것이 이 시대 교인들의 모습입니다.

 

사도신경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하는 사람은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왜 사람이 만들어 놓는 것을 예배를 드릴 때 마다 그것을 마치 주문을 외우듯이 하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하지만 율법에 의해서 포승으로 묶여 있는 교인들은 그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고 오히려 사도 신경을 안 외우면 이단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을 했습니까?

절대로 종교개혁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오시고 난 후에 313년에 기독교가 공인이 되고 난 이후에 교회는 지금까지 계속해서 타락을 해 왔습니다. 프로테스탄트교회가 종교개혁을 했다고는 하지만 이 사도신경 하나만 보아도 천주교의 것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습니다.

 

제가 비방을 하고 있습니까?

분명히 율법은 폐하여졌습니다. 저는 비방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절하는 율법을 지키고 있는 교회를 성경적으로 분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비방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절하는 행위를 하고 있는 그것에 대해서 분별을 하고 있는 것이지 율법을 안 지킨다고 비방하지 않고 있습니다.

 

누가 비방을 합니까?

율법을 지키고 있는 교회가 안 지킨다고 비방을 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율법을 폐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고 율법을 폐하지 않는 것을 행함이 없는 믿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비방이라는 것은 율법을 지키는데 그것을 안 지키는 것을 보고 비방하는 것을 비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5:30절을 보겠습니다. (신 97쪽)

“바리새인과 저희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세리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 세리는 죄인입니다. 쉽게 말씀을 드려서 우리나라가 일제 강점기에 있을 때 일본 사람들을 위해서 세금을 걷고 있는 사람이라고 보면 맞습니다. 더구나 로마의 속국이다 보니까 세금을 이중으로 걷으려면 얼마나 사람들로부터 나쁜 평판을 들었겠습니까?

 

주님이 이 세리와 함께 먹고 있습니다.

레위라는 세리를 부르시니까 레위가 자기 집에서 예수님을 위해서 큰 잔치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바리새인들이 보고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바리새인들은 죄인들과는 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상으로 매여 있는 그들에게 주님께서 레위라는 세리와 그리고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을 보고 비방을 하고 있습니다.

 

왜 비방을 합니까?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에 반하는 것을 보고 비방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윤리에 반하는 행위를 하는 것을 보고 비방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볼 때 세리는 죄인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을 보면서 비방을 하고 있습니다.

 

왜 비방을 합니까?

세리와 죄인과 같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과 식사를 하는 것만으로도 그들과 같은 사람이라고 취급을 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비방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말에 초록은 동색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으면 같이 먹는 그 사람도 죄인이고 세리와 같이 윤리적으로 방종을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비방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 그럴 것입니다.

이 시대 비난을 받는 교회가 있습니다. 그곳에 가서 진리를 전하면 아마도 그곳의 사상을 전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곳에 가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들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문제지 가서 그들에게 바른 진리를 전한다면 무엇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하지만 사람들은 그들과 같이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 비방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어디서 나옵니까?

율법에서 나오고 있고 신앙생활의 윤리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자기 이성으로 생각하는 것이 오랜 세월 동안 쌓이고 쌓여 있습니다. 그것이 어느 덧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생각이 되고 있습니다.

 

죄인입니다.

물론 세리와 그리고 죄인들은 분명히 죄인입니다. 그들이 죄인이 아니라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모르기 때문에 이 모습을 보고 비방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의인을 만나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찾아 구원하러 오셨다고 했지만 이스라엘은 흠 없는 율법의 의를 가지고 있다 보니까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잡수시는 것을 보고 비방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주의입니다.

그리고 성화주의입니다. 또 이 시대는 은사주의까지 포함이 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육체의 모양을 보고 다른 사람을 비방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이 어디서 나오고 있는가 하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데서 부터 출발이 되고 있습니다.

 

시편42:9-10절을 보겠습니다. (구 833쪽)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 내 뼈를 찌르는 칼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버림을 받고 대적을 했는가를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그들은 조상대대로 성경을 보고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믿으면서 살아왔지만 그 원인은 성경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과 같이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으로 성경을 보다보니까 도무지 그 안에서 말씀하고 있는 진리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사실 성경은 사람의 이성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아니 사람의 이성으로 보아도 아주 쉽게 해석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더 쉽게 보고 있습니다.

 

내 반석의 하나님께 말을 하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묻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런 말씀들을 보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육체적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 육체가 고난을 받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자기를 잊으셔서 고난을 받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영의 일입니다.

구약을 보면서 육의 일로 생각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이 말씀을 보고 자기 육체의 고난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잊은 것으로 생각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직까지 육의 사람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 이 시가 그런 육적인 것을 고백하는 시입니까?

 

이스라엘이 그렇게 봤습니다.

그리고 역시 이 시대도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자기가 누구로부터 비방을 받고 있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가 또한 누구로부터 압제를 당하고 있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육의 이스라엘은 흠 없는 율법의 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 말씀을 그들의 이성으로는 도무지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

 

원수의 압제로 슬프게 다니고 있습니다.

그 원수가 육적인 원수입니까? 물론 구약의 원수는 육적으로 보여 질 수 있습니다. 아니 그림자를 하나님께서는 육적으로 보이게 하셨습니다. 실제 이스라엘은 이방에 의해서 압제를 당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육적인 압제를 통해서 우리에게 영의 일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누가 압제를 당했습니까?

그리고 누가 원수입니까? 아직까지도 이 원수가 누구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아니 제가 원수라고 하면 저를 비방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분명히 에베소서에서 율법을 원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율법을 원수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고 원수라는 말씀을 받아들이지도 않고 있습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입니다.

부자는 율법을 잘 지킨 사람입니다. 그리고 나사로는 율법을 잘 지키지 못해서 거지와 같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나사로를 개들이 와서 헌데를 핥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거지 나사로가 율법주의자들인 개들로부터 압제를 당하고 있다는 것을 시편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못 지킵니다.

그러니까 그 율법이 원수가 되어서 압제를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율법을 지킨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율법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문자적으로는 어느 정도 지키고 있을지 몰라도 의미적으로는 십계명의 어느 한 가지도 지키지 못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깨달을 지혜가 그들에게는 없어서 자기들의 원수가 무엇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십계명입니다.

그것을 의미적으로 아는 성도는 자기가 그것 중에 하나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아는 성도만이 원수가 자기를 압제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고 그런 성도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사모해서 나를 잊으셨나이까 라는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나에게 임하게 해 달라는 고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니고는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이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모릅니다.

자기가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얼마나 슬픈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율법의 압제로 인하여 도저히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자기를 모르니까 슬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압제를 알고 있는 성도는 슬퍼하고 있고 주님의 은혜를 너무도 간절하게 바라고 있습니다.

 

내 뼈를 찌르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율법이 나를 비방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정말 이런 시편의 말씀을 모르면 자기 원수가 누구인가도 모르고 자기 대적이 어떻게 하고 있는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율법은 나를 비방합니다.

그러나 문자적으로 살인을 하지 않고 있고 간음을 하지 않고 있고 도적질을 하지 않고 있고 우상에게 절하지 않고 있는 사람은 대적이 자기를 어떻게 비방을 하고 있는 줄을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실제 보이는 대적이 아니라 율법이 우리에게 지금도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니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나사로와 같은 사람들을 보면서 네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세상 죄를 지고 가셨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대적이 우리를 비방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면서 대적이 되어서 비방을 하고 있습니다.

 

비방하고 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늘 그렇게 비방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눈에 보이는 행위를 보면서 따라하지 않는 사람들을 비방을 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계속해서 이 율법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율법을 너무 모르고 있고 야고보서를 보면서 도리어 율법을 더 잘 지키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이 게시물은 그리스도편지님에 의해 2015-03-11 16:34:38 로마서강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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