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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강해 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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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그리스도편지 작성일 :작성일 :14-10-02 19:56 조회 : 567회 댓글 : 0건

본문

야고보서4:9절을 보겠습니다. (신 375쪽)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찌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찌어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괴로워하십시오. 슬퍼하십시오. 우십시오. 여러분의 웃음을 슬픔으로 바꾸십시오. 기쁨을 근심으로 바꾸십시오."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라고 말씀합니다.

왜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누구에게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두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아니 두 마음을 품고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성도라 해도 우리 역시 두 마음에서 완전하게 자유 할 수 없다는 것을 또한 깨달아야 합니다.

 

두 마음입니다.

성도라 해도 역시 두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을 버리고 안 버리고의 차이가 있겠지만 이것을 완전하게 끊을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육체를 가지고 있는 인생은 끊임이 없이 자기 안에서 선을 행하고 의롭게 살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삽니다.

정말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고자 합니다. 그래서 더욱 경건하게 살려고 노력을 하고 있고 그것이 결국에는 교회 안에서 율법의 행위로 나타나고 있고 성화의 모양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가 복음을 알고 있다 해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모든 사람은 이것에서 자유 할 수 없습니다. 아니 두 마음을 가지고 싶어 하고 또 자기도 모르게 두 마음을 가진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아니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야고보가 애통하고 슬퍼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통해서 나타나고 있는 두 마음을 품은 것을 보게 되면 슬퍼하고 애통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슬퍼하고 애통해야 하는가 하면 그 두 마음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고 또 그것을 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생입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 존재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두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힘주어서 말은 하고 있지만 실제 인생들은 한 남편인 예수 그리스도보다는 두 마음을 가지기를 좋아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내가 통제할 수 있으면 좋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마귀를 대적할 수 있다면 좋은데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두 마음을 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가 아무리 복음이 있다 해도 역시 행위를 보면 마음을 빼앗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사람의 이성으로 너무 좋기 때문에 두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고 어느 새 자기도 모르게 행위에 빠져 들어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떻게 됩니까?

무조건 사망이라고 보면 맞습니다. 그런 사망을 당하는 자기 모습을 슬퍼하지 않고 있다면 그는 성도라 할 수 없습니다. 왜 슬퍼해야 하는가 하면 어쩔 수 없이 지고 있는 자기 육체를 보면서 슬퍼하라는 말씀입니다. 죄 때문에 지는 것이 아니라 두 마음을 품는 그것으로 지고 있는 자신을 보면 슬퍼할 수밖에 없습니다.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정말 성경을 알면 우리 인생은 어떻게 해도 구원을 받을 수 없고 그저 짐승과 같이 살다가 죽어야 합니다. 내세에 대한 소망이 없이 그저 팔십년을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 인생의 모습을 보면 너무도 슬플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죄 때문의 문제라면 이제 슬퍼하지 않아도 되지만 의 때문에 그렇게 되는 자기를 보면서 슬퍼해야 합니다.

 

죄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이 세상 죄를 지고 가신 것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죄의 문제가 아니라 의의 문제로 내가 사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아는 성도는 슬퍼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탄식을 했습니다.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말씀하면서 슬픔에 탄식을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해서 계속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저 문자적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 은혜라는 단어를 보고 은혜도 모르고 은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편38:17-18절을 보겠습니다. (구 830쪽)

“내가 넘어지게 되었고 나의 근심이 항상 내 앞에 있사오니 내 죄악을 고하고 내 죄를 슬퍼함이니이다”

 

내가 넘어지게 되었고...

인생은 항상 넘어집니다. 구약의 죄는 신약에 와서 악이라는 것을 우리가 바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내 죄를 인하여 슬퍼한다는 이 말씀은 악으로 인하여 슬퍼한다는 그 말씀입니다. 구약의 성도가 죄로 넘어지는 것은 신약의 성도가 악으로 넘어지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죄의 문제 해결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악의 문제에서 어느 누구도 자유 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 죄를 지고 가심으로 해서 이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자기를 보니까 이제 악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내가 행하고 있는 모든 것이 다 악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성도는 슬퍼하게 되어 있습니다.

 

알아야 슬퍼할 수 있습니다.

그냥 슬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슬퍼하라고 하니까 그저 자기 육체를 슬프게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을 모르면 슬퍼하라고 해도 슬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저 눈물을 흘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두 마음을 품고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보면서 슬퍼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넘어집니다.

이것에서 안 넘어지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가 성경의 모든 비밀을 알고 구원을 받은 성도라 해도 역시 어느 새 자기도 모르게 넘어져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게 넘어져 있는 자기를 보면서 슬퍼해야 하는데 자기가 넘어져 있는지 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를 지나면서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넘어졌다는 것조차 모르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으로 넘어졌습니까?

율법으로 넘어졌습니다. 성화의 삶으로 넘어졌습니다. 은사로 넘어졌습니다. 기복주의로 넘어졌습니다. 그리고 아세라에 의해서 다 넘어졌습니다. 정말 많은 것으로 넘어져 있으면서도 그것을 오히려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슬퍼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기뻐하고 있습니다. 정말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 영혼이 망하는 것을 보면서 통곡을 해야 하는데 그것을 보고 오히려 너무 기뻐서 마음에서 감격을 누리고 있습니다. 성경을 모르면 그리고 성령의 감동을 받지 못하고 있으면 이렇게 된다는 것을 바로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어느 누구도 이것이 넘어진 것이라고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히려 칭찬합니다.

그것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내고 있는 십일조를 보면서 기뻐하고 있고 자기들이 드리고 있는 예배를 보면서 기뻐하고 있고 자기들이 부르는 찬양에 감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행위들로 인하여 자기 영혼이 망하는 것을 안다면 정말 슬퍼해야 합니다. 나에게서 그런 모양이 나타날 때 마다 슬퍼해야 합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너무 기뻐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넘어져 있으면서도 그것이 서 있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넘어져서 악을 행하고 있고 그것으로 인하여 자기 영혼이 망하고 있는데도 그것을 오히려 기뻐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 거의 모든 교인들이 다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사단을 너무 쉽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 안에 있는 다수가 죽는 줄도 모르게 사망에 이르게 만들고 있습니다. 아니 그들은 자기들이 천국에 가는 성도라고 생각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을 무엇으로 넘어지게 하고 있는가 하면 바로 교회 안에서 행하고 있는 행위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는 모든 행위가 그렇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은 너무 타락했습니다.

진리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얼마나 종교에 묶여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종교가 되어서 율법주의가 되었다는 것을 성경을 조금만 주의 깊게 보아도 알 수 있는 그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방의 교회는 거기에 한술 더 떠서 은사와 성화가 만연을 하고 있는데도 자기들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는 그것을 보면서 도리어 기뻐하고 있습니다.

 

세상 종교가 아닙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믿고 있는 성도입니다. 이 세상의 이성으로 성경을 보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령이 아니고는 성경을 아무리 보아도 도무지 깨달을 수 없습니다. 아니 내가 기뻐해야 하는 일인가 슬퍼해야 하는 일인가를 도무지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두 마음을 품었으면 슬퍼해야 합니다.

그것은 아린아이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오히려 기뻐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보면 슬퍼해야 하는데 그리고 애통해서 울어야 하는데 오히려 그것을 보고 기뻐하고 있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으로 알고 감격해 하고 있습니다.

 

전도서7:6절을 보겠습니다. (구 954쪽)

“우매자의 웃음소리는 솥 밑에서 가시나무의 타는 소리 같으니 이것도 헛되니라”

 

우매자의 웃음소리입니다.

그 웃음소리는 솥 밑에서 가시나무가 타는 소리 같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솥 밑에서 가시나무의 타는 소리 같다는 말씀은 지옥 불에 들어간다는 말씀입니다. 우매자의 웃음소리가 얼마나 헛된가를 전도서에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웃고 있습니다.

무엇으로 그들이 웃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웃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행하고 있는 행위를 보면서 웃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매자의 웃음소리라는 것을 모르고 교회 안에서 마음껏 기뻐하고 있는데 그것이 나중에 애통의 날로 변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매자는 웃습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 있는 우매자들은 웃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하고 있는 행위를 보면서 웃고 있습니다. 종교화되어 있는 교회는 그렇게 자기들의 모습을 보고 웃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우매자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 가조차 모르고 있고 웃고 있는 우매자로 살아가면서도 자기가 지혜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도서10:2절을 보겠습니다. (구 958쪽)

“지혜자의 마음은 오른편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왼편에 있느니라”

 

지혜자의 마음은 오른편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매자의 마음은 왼편에 있습니다. 지금 교회 안에 있는 두 사람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지혜자가 있고 우매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다 자기들이 지혜자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는 교회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다 우매자로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자기를 지혜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른편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이 되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그 구속의 일에 마음에 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지혜자의 마음은 이렇게 오른편에 있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왼편입니다.

그것은 왕입니다. 이 세상에서 부자로 그리로 왕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교회 안에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무엇을 보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가 하면 자기들이 행위를 보고 있고 세상 사람들과 비교를 하는 그것이 왼편에 있는 마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혜자는 슬퍼합니다.

나를 보면 슬퍼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대제사장으로 오시지 않았다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자기를 보면 슬퍼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우매자는 교회 안에서 자기가 행하고 있는 그것을 보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는 자기를 보고 있고, 성화가 되는 자기를 보고 있고, 또 은사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기를 보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 웃음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두 마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반드시 지혜자의 마음은 오른편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왼편에 있습니다. 지혜자의 마음이 왼편에 있을 수도 있고 오른편에 있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니라 지혜자의 마음은 반드시 오른편에 있습니다. 그리고 우매자의 마음은 반드시 왼편에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두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고 있을 때는 너무도 슬퍼합니다. 그러나 자기 행위를 보면 또 너무도 기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매자입니다. 하지만 성도는 절대로 자기 행위를 보고 웃지를 않고 있습니다. 반드시 오른편과 왼편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내 마음이 어느 편이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오른편에 있는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기 때문에 슬퍼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의 어떤 행위로도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슬퍼하게 되어 있습니다. 설령 내가 행위를 잘 해서 웃을 수 있는 일이 있다 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알고 있다면 애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웃고 있는 그것이 내 영혼을 망하게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애통합니다.

 

그러나 우매자는 어떻습니까?

그 마음이 왼편에 있습니다. 양과 염소의 비유를 보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오른편에 있고 교회 안에 있는 가라지는 왼편에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고 가라지는 자기 행위를 보면서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 행위가 좋아지는 것을 보고 너무도 기뻐하고 있습니다.

 

왜 웃습니까?

자기들이 잘하고 있는 것을 보니까 웃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른편에 마음에 가 있는 성도는 내가 한 것이 없기 때문에 슬플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애통하는 자에게 주님께서 위로를 주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 행위를 보고 웃는 사람이 있고 자기 행위를 보고 애통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복음6:25절을 보겠습니다. (신 99쪽)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누가 애통합니까?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 그리고 자기가 악인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애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행위를 보고 웃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하는 모든 행위가 다 악이라서 사망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는 지혜자는 애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애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애통하는 자를 주님께서 위로해 주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가 율법주의, 은사주의, 성화주의에 빠져 전혀 애통하지 않고 있습니다. 나를 보면 애통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자기들의 행위를 보고 오히려 즐거워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꾸라고 말씀합니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교회가 너무 상업화 되고 종교화되어서 그 안에서 웃음이 없고 즐거움을 없으면 교회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우매자로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어느 편에 마음을 두고 있는가를 모르기 때문에 자기가 웃어야 하는지 애통해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7:10절을 보겠습니다. (신 293쪽)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꾸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 자기들의 행위를 보고 즐거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야고보는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꾸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왼편에 있고 그 왼편에 있는 것을 보게 되면 즐거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냥 근심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에 대해서 근심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두 마음을 가지고 행위를 보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근심을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왼편의 것을 보고 즐거워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근심을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혼 구원을 위해서 근심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세상 근심이 아닙니다,

성도는 이미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도 모르게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두 마음을 가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지혜자가 되어서 오른편만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데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늘 왼편의 것이 마음에 들어오고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근심을 하라는 말씀이지 세상 근심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행위를 잘하면 즐겁습니다.

그러나 그 행위라는 것이 바로 왼편에 있는 것입니다. 그 왼편에 마음을 빼앗겼으면 당연히 근심을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행위를 잘하면 근심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즐거워하는 그것으로 자기 영혼이 사망에 이른다는 것을 모르고 있고 그것이 두 마음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성도는 영혼 구원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근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행위를 보고 근심을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 있는 다수는 그것을 보고 근심하기 보다는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그 마음에 지혜가 없어서 왼편의 것을 보는 우매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회 안을 보시기 바랍니다.

누가 더 많이 있습니까? 자기 행위를 보고 근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다 자기가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 잘하고 있다고 판단이 되면 그것을 보고 즐거워하지 근심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꾸어야 하는데 그렇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더욱 더 즐거워하고 싶어서 견디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지혜자의 마음과 우매자의 마음입니다.

지혜자는 구원을 생각하고 있지만 우매자는 교회 안에서 성도로서의 삶을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왼편에서 나타나고 있는 행위를 보면서 근심해야 하는데 오히려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행위가 나타나면 지혜자는 근심을 하고 있고 우매자는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행위가 구원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나에게서 율법의 행위가 나오고 또 성화가 되려고 하는 경건의 모양이 나오고 또 은사가 나오고 있다면 그것은 당연히 근심을 해야 합니다. 지혜자는 그것이 악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근심을 하고 있지만 우매자는 그것을 보고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위해서 야고보는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꾸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이 시대는 성경과 거꾸로 가고 있습니다. 애통해야 하는 일을 보고 웃고 있고 근심해야 하는 일을 보고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매자의 마음이 왼편에 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혜자의 마음이 있어 오른편에 있다면 당연히 그것을 보고 애통해하고 있고 또 근심을 하고 있지만 우매자라서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그들에게는 없습니다.

 

구원입니다.

성경은 이것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지 못하면 그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교회에 나온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사람이 아주 적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매자들은 자기가 교회 안에 있으면 구원을 받은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행위를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4:10절을 보겠습니다. (신 375쪽)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주 앞에서 낮추라고 말씀을 합니다.

겸손의 모양으로 낮추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행위를 통해서 낮추려고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너무 쉽게 보려 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이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으면 자기 행위를 통해서 낮추려고만 하고 있습니다.

 

주 앞에서 낮추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첫 번째가 하나님께 순복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에 복종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복음에 복중을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께 아무리 행위로 낮추고 겸손의 모양을 낸다 해도 그는 오히려 더 교만한 자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복음에 복종을 하기 보다는 오히려 율법의 행위로 자기를 높이면서 교만해 지고 있습니다.

 

복음에 복종하시기 바랍니다.

그가 아무리 교회 안에서 겸손의 모양을 내고 하나님 앞에서 낮은 자세로 신앙생활을 한다 해도 복음에 복종하지 않고 있다면 그는 스스로를 높이고 있는 악한 자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먼저 복음에 복종을 하고 마귀를 대적해야 그가 하나님 앞에서 낮추고 있는 성도라는 말씀입니다.

 

두 마음을 품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주 앞에서 낮추는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지만 그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를 보시기 바랍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 중에 두 마음을 품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거의 없습니다. 다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스스로 망하는 길로 가고 있습니다.

마귀가 일을 하기도 전에 자기들 스스로가 성경을 보면서 율법주의에 빠져 두 마음을 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두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그들이 얼마나 높아져 있는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지급 이 시대 교회 안에 목사들이 그리고 중요한 직분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얼마나 높아져 있는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무엇으로 높아 졌습니까?

그들의 행위로 높아져 있습니다. 자기들이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모든 행위들로 마음에 높아져 있습니다. 겉으로는 겸손의 모양을 내고 낮추는 것 같이 보이지만 그들이 얼마나 높아져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낮아지라고 하니까 사람들이 참으로 어리석습니다.

 

무엇을 합니까?

교회에서 목사가 장로가 화장실 청소를 하고 있고 또 교인들이 오는 길에서 맞이하고 있고 굳은 일들을 하면서 자기들이 낮아 졌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 사람들이 낮아지고자 하는 모습니다. 그것은 불교에 가도 그렇게 하고 있고 천주교에 가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 안 해도 됩니다. 그런 외적인 것을 하면서 자기가 낮아 졌다고 하지만 그 마음에서는 이미 많이 높아졌습니다.

 

망하는 길입니다.

성경이 그런 일을 하라고 낮아지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까? 그런 일 안 하면 어떻습니까? 성경을 모르면 그렇게 자기들의 육체의 행위를 통해서 자기가 낮아졌다는 것을 보이려 하고 있습니다. 영으로 낮아져야지 그런 육체의 모양으로 낮아지는 것은 오히려 교만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웃음을 애통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리고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성경은 성도가 어떻게 낮아져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지만 낮아지라는 말씀이 있으면 앞뒤에 있는 말씀은 생각하지도 않고 그저 낮아지라는 단어에 집착을 하고 사람의 이성으로 낮아지려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과 같이 이방의 교회도 역시 그렇게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보고 있고 스스로가 망하는 길로 가고 있으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18:9-14절을 보겠습니다. (신 126쪽)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높아지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이스라엘에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이 무엇으로 높아져 있는가를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를 말씀을 하시면서 누가 높아져 있고 누가 낮아져 있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시대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바리새인이 어떻게 기도를 하고 있습니까?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고 있다고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바리새인들은 이 기도를 알기 때문에 이렇게까지 기도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기도합니까?

십일조를 낼 수 있어 감사합니다. 그리고 주일을 지킬 수 있어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도와 주셔서 나를 인도해 주셔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십일조를 낼 수 있고 또 주일을 지킬 수 있어 감사합니다. 라고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기도와 앞에 있는 바리새인의 기도와 무엇이 다릅니까?

 

똑같은 기도입니다.

하지만 자기들이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기도를 하지 않고 성령의 감동으로 이런 일을 했다는 그것으로 마치 자기들이 높아지지 않은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과 같지 않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이미 높아져 있는 것입니다.

 

다릅니다.

누구와 다릅니까? 이 세상 사람들과는 자기들이 분명히 다르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한 가지라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떻다는 것을 바로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고 은사가 나타나고 성화가 되고 하는 사람들은 이미 이 바리새인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높아져 있습니다.

아니 자기도 모르게 스스로 높아집니다. 자기가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한 행위가 그렇게 자기 마음에서 높아지고 있다는 것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바리새인과 같이 기도를 하지 않아도 바리새인과 같이 율법을 지키고 성화가 되려고 하는 그 자체가 이미 높아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많은 행위가 아닙니다.

단 하나의 행위가 바리새인이 되게 만들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십일조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 사람은 십일조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누가 높아지겠습니까? 겉으로는 높이지 않을지라도 자기 마음에서는 나는 하나님께 십일조를 했고 저 사람은 십일조를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낮아지시기 바랍니다.

낮아지는 것이 무엇인가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리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이 세리가 십일조를 내지 않았겠습니까?

 

이스라엘의 백성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자기가 한 행위를 하나도 생각하지 않고 가슴을 치며 나는 죄인이라고 말하고 있고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자기가 교회 안에서 정말 복음을 위해서 많은 일을 했을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낮추고 있습니다.

 

그저 말로 자기를 낮추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성경 말씀을 지식으로 알고 이렇게 하는 것이 낮추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한 행위에 대해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바리새인과 같이 율법을 지켜서도 안 됩니다. 율법을 지키면서 세리와 같은 기도를 한다 해도 그는 겉으로 자기가 낮아 졌다는 것을 보이기 위한 기도지 실제로는 그 마음에서는 높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다 죄입니다.

그리고 다 악인입니다. 그것을 아는 성도는 세리와 같은 기도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한 모양 그리고 성화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그가 겉으로는 성경을 보고 지식적으로 알고 있는 세리와 같은 기도를 하고 있을지라도 이미 그 행위로 높아져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행위를 했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자기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같이 기도를 하지 않을지라도 그런 행위를 하고 있는 사람은 이미 주 앞에서 높아져 있다는 것을 주님께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어떤 것이 높아지는 것이고 어떤 것이 낮아지는 것인가를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행위로 마음껏 높아져 있으면서 이런 성경말씀을 지식으로 알고 있어서 겉으로는 세리와 같은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우리 마음과 심장과 폐부까지도 감찰하지는 분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한 행위가 있으면 그것을 기억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을 위해서 한 일을 잊어버릴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 그 자체가 이미 높아져 있습니다. 아니 그 행위를 하고 있다는 그 자체가 높아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시편69:29절을 보겠습니다. (구 852쪽)

“오직 나는 가난하고 슬프오니 하나님이여 주의 구원으로 나를 높이소서”

 

누가 낮은 자입니까?

나는 가난하고 슬프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물질이 가난한 것이 아니라 율법의 행위가 가난하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잘 지키지 못해서 아니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어서 구원을 받을 수 없어서 가난하다고 고백을 하고 있고 주의 구원으로 나를 높여 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가난해야 합니다.

일부러 가난해 지라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알면 자기가 얼마나 가난한 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율법을 모르면 바리새인과 같은 부자가 되고 율법을 바로 알면 가난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 시대는 너무 부자가 많이 있습니다.

 

율법을 모릅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십계명을 보고 자기가 육적으로 살인을 하지 않았다고 부자가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뭐라 고백을 합니까? 자기를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을 합니다. 왜 그런 고백을 할 수밖에 없는가 하면 율법을 알고 보니까 자기가 살인을 한 자요 간음을 한 자요 도적질을 한 자요 모든 율법을 어긴 자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릅니다.

이 시대는 율법을 모르기 때문에 그저 문자적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 율법을 보고 자기가 실인을 하지 않았다는 그 자체로 부자가 되고 있습니다. 성경을 모르면 다 그렇게 됩니다. 내가 얼마나 가난한가를 알아야 시편의 고백이 나올 수 있습니다.

 

가난합니다.

율법을 알면 스스로 가난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모르면 바리새인과 같이 그런 기도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아니 기도를 그렇게 하지 않을지라도 자기 마음에서는 이미 부자가 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한 행위와 그렇게 하지 않은 사람과 비교를 해서 부자가 됩니다. 행위가 사람을 어떻게 만든다는 것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가난해야 낮아집니다.

부자는 절대로 낮아질 수 없습니다. 주 앞에서 낮추려면 이렇게 율법을 바로 알아야 낮아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가난한 자는 구원을 생각하면 슬퍼할 수밖에 없고 주님 앞에서 한 없이 낮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성도만이 주의 구원을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이 게시물은 그리스도편지님에 의해 2015-03-11 16:34:38 로마서강해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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